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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 및 무역 제도의 변천

John.Cho 2013. 2. 25. 20:21

국제통화 및 무역 제도의 변천.pdf


제5화 국제 통화 및 무역 제도의 변천

이 시간 방송 순서를 알려 드립니다.


첫 번째,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두 번째,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세 번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1년,


네 번째, 1971년 이후부터 현재입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아나운서:안녕하세요? ‘이것이 알고 싶다.’의 ‘김 아나’입니다. 오늘은 국제 통화 및 무역 제도의 변천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먼 과거에는 소규모 생산, 이동수단의 제약 등으로 국가 내에서만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만 산업이 발전하고 국내외 이동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국가 간 교역 사례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나라마다 사용하는 통화가 다르므로 지급방식에 대한 국가 간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합의 형태는 당시의 경제적ㆍ사회적 여건에 따라 변화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각 시대의 무역형태도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 통화 및 무역 제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시기를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도 스튜디오에는 전문가 선생님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방청객 여러분도 많이 오셨군요. 전문가 선생님 강의 중에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질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한국은행의 김민영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김민영 교수:네, 안녕하세요? 한국은행의 김민영 교수입니다.


아나운서:안녕하세요? 교수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민영 교수:이번 시간에는 국제 통화 및 무역 제도의 변천과정을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1년까지, 마지막으로 197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4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입니다.


김민영 교수: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는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주의의 정착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운서:교수님! 금본위제란 무엇인지 먼저 설명해 주시겠어요?


김민영 교수:네, 금본위제란 각국의 통화가치를 금의 일정한 중량으로 정해 놓고 금화의 자유로운 주조와 수출입을 허용하여 이를 지폐나 예금통화와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금본위제하에서의 각국 통화는 금의 중량을 기준으로 그 가치가 정해져 있어 통화 간 교환비율, 즉 환율이 금을 통하여 고정됩니다. 당시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던 영국이 금본위제를 법제화하면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금본위제가 확산되었습니다.


아나운서:아, 저기 방청객에서 질문이 있군요. 질문해 주시죠.


한은별:금본위제가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민영 교수:네, 금본위제가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세계 무역과 금융을 주도하던 영국과 독일이 금본위제로 옮겨감에 따라 다른 나라들도 무역거래와 해외차입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연쇄적으로 금본위제를 수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19세기에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에서의 금광 발견으로 세계 금 공급량이 크게 늘어났던 점도 금본위제 정착에 기여하였습니다.

자유무역이 지배하였던 당시 금본위제의 정착으로 환율까지 안정적으로 고정되면서 국가 간 교역은 크게 활성화되었고 세계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아나운서:자, 이제 첫 번째 시기에 대한 설명이 끝났습니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방청객 퀴즈 대항전을 보시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아나운서:이제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교수님, 이 시기는 한마디로 금융제도가 불안정해지고 보호무역주의가 확대된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김민영 교수: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금본위제의 기능은 정지되었습니다. 이는 금의 해상수송이 곤란해지고 각국이 전비조달을 위해 금을 축적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통화와 금의 교환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환율의 변동폭이 확대되었고 전쟁의 영향으로 국제금융제도의 불안정성이 심화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위상이 약화되어 국제금융체제를 이끌어 나갈 리더십에 공백이 생겼습니다.


아나운서:아, 저기 방청객 질문이 하나 또 나왔습니다. 질문해 주시죠.


나신입:그렇다고 영국이 조용히 있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무슨 수를 내지 않았나요?


김민영 교수:네, 그렇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영국은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꾀하게 됩니다. 1925년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비율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수준으로 복귀시켰는데, 이 조치는 과도한 전비지출로 인해 이미 물가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 상황에서 파운드화를 과대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 상품에 대한 해외수요가 감소하였고 실업이 증가하는 등 영국의 경기침체가 심화되었습니다.


아나운서:자, 그럼 여러분, 영국의 금본위제 재개를 신호로 1926년까지 총 39개국이 금본위제를 운영하였지만, 금본위제의 재건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원인이 아래 자막에 나갑니다. 자막을 클릭하셔서 반드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아, 저기 방청객 질문이 하나 또 나왔습니다. 질문해 주시죠.

한은별:그렇다면 금본위제의 실패와 함께 대공황에 직면하였던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을 했나요?


김민영 교수:네, 각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출을 촉진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1930년대 들어 환율을 경쟁적으로 절하하였고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습니다. 상대국을 희생시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국제금융제도는 더욱 분열되었고 종전의 국제협력 분위기가 퇴색됨에 따라 각국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되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금본위제로의 복귀 사이에 환율변동에 따른 단기자본의 빈번한 이동으로 인한 불안정성을 경험한 국가들은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환율의 변동폭을 제한하였습니다.

1930년대 경쟁적인 환율절하는 각국이 경기 회복을 위해 취한 정책수단이었으나 국가 간 긴밀한 협력 아래 조화롭게 실시되지 못하고 무절제한 행태를 보임으로써 그 효과가 반감되었고 국제금융시스템의 혼란, 근린궁핍화 현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결국, 국제사회는 이러한 상황 전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아나운서:자, 이제 두 번째 시기에 대한 설명이 끝났습니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두 번째 퀴즈대결을 보시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아나운서:자, 이제 세 번째 시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서 1971년입니다. 교수님. 이 시기에는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라는 새로운 국제금융제도가 출범하였죠?


김민영 교수:네,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개최된 각국 정상들의 회의에서 대공황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국제적인 경제협력기구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국제사회는 IMF, IBRD, ITO로 대표되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창설하였습니다. IMF는 국제 통화협력 증진과 환율조정을, IBRD는 세계경제의 부흥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ITO는 국제무역문제를 각각 담당하였습니다. IMF와 IBRD는 1945년 가맹국의 비준을 받아 1947년부터 업무를 개시하였으나 ITO는 미국 등 다수국이 비준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GATT'로 대체되었습니다.


아나운서:GATT에 대한 설명이 아래 자막에 나갑니다. 자막을 클릭하셔서 반드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김민영 교수:브레튼우즈 체제에서의 환율제도는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경험한 변동환율제도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제도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은 자국통화와 미 달러화 간의 교환비율, 즉 평가를 설정하고, 실제 금과의 교환이 가능한 통화는 미 달러화로만 한정하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IMF는 가맹국으로 하여금 자국통화의 평가를 설정하도록 하고, 각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및 규제를 통해 일일 환율 변동폭을 평가의 상하 1% 범위에서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나운서:브레튼우즈 체제는 국가 간 환율 안정을 통한 국제교역의 활성화에 기여했겠군요.


김민영 교수: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이 지속적으로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함에 따라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면서 많은 국가들이 자국이 보유한 미 달러화를 금으로 교환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1971년 미 달러화와 금의 교환 정지를 선언하게 되었고 이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는 무너지게 됩니다.


아나운서:아,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렇게 무너지게 되는군요.

아, 저기 방청객 질문이 하나 또 나왔습니다. 질문해 주시죠.


나신입:그렇다면 브레튼우즈 체제의 근간이 되었던 IMF, IBRD, GATT는 어떻게 되었나요?


김민영 교수:아, 네. IMF, IBRD, GATT는 그 역할과 성격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IMF는 1980년대 ~ 90년대 남미와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금융위기의 예방과 대책 마련 등 위기관리자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IBRD는 1980년대 이후 업무분야를 저소득 국가의 경제ㆍ사회 개발로 확대하였고, 1990년대 들어서는 환경문제의 해결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GATT는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1995년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로 확대ㆍ개편되었습니다.


아나운서:자, 이제 세 번째 시기에 대한 설명이 끝났습니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번에도 퀴즈 대결을 보시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아나운서:자, 이제 네 번째 시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네 번째 시기는 197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입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나라들이 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였고 국가 간 자유무역도 확대되었습니다. 김민영 교수님,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민영 교수:네, 미 달러화의 금태환 정지로 주요 국가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뒤에도 각국 통화당국은 이를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고정환율제로 복귀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국제통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1976년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회의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 킹스턴 체제가 출범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킹스턴 체제하에서 각국은 자국의 경제여건에 적합한 환율제도를 택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변동환율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화의 가치척도로서 기능하였던 금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었고 IMF가 창출한 국제통화의 일종인 SDR의 역할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SDR은 중앙은행 간 공적 거래에 국한되어 사용되며 활용도가 그리 높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편, GATT는 그간 국제무역의 활성화에 기여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의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발생하면서 그 체계가 흔들리게 됩니다. GATT에서는 상품의 무역을 주로 다루었는데 서비스 무역규모가 점차 확대되면서 개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새로운 국제무역질서를 정립하기 위한 다자간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우루과이라운드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는 GATT의 출범 이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협상이었는데 그전에 이루어진 7차례의 협상은 주로 관세 인하를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이 우루과이라운드 결과 시장개방 확대, 서비스 무역 문제해결 등 GATT의 업무범위 확대, 긴급수입규제조치 등 개발도상국의 주요 관심사항 수용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GATT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여 1995년 WTO를 설립하게 됩니다.


아나운서:자, WTO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아래 자막에 나갑니다. 자막을 클릭하셔서 반드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그럼 계속해서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민영 교수:네, GATT나 WTO하에서는 모든 국가가 참여해서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다자주의가 기본원칙입니다. 그러나 각국이 처한 사정이 다를 경우 합의 도출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합의에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따라서 합의 도출이 비교적 용이한 특정 국가들 간에 무역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이를 FTA라고 합니다.

FTA는 협정을 맺은 나라 사이에 서로 사고파는 물건을 시장개방, 관세 면제 또는 인하를 통해 국산품처럼 대우하겠다는 국가 간의 약속입니다. 1980년대 2건에 불과하던 세계 FTA 발효 건수는 1990년대 49건, 2000년대 70건 이상으로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FTA 체결 현황은 아래 자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아, 정말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금융제도는 각 시대의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해왔군요. 자, 그럼 교수님. 오늘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번에도 퀴즈 대결을 보시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한은별:오늘 방송 어땠어?


나신입:응,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어. 국제 통화와 무역제도가 시대에 따라 그렇게 변해왔다니… 내가 모르던 것들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유익한 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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